금누리 누리.널리.알림

누리.널리.알림

2024/03/08(20:38) from Anonymous Host
작성자 : 발바라.쿠루겔 +> 김정락 > 누리	조회수 : 1259 , 줄수 : 50

문자의 . 힘

20세기 미술의 독특한 현상 중 하나는
문자가 이미지가 되어 그림 속에 파고든 것이다.
이른 사례로, 입체파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에서
문자는 콜라주의 양태로 미술에 포함되었다.
오래 전에 게시한 인디애나의 를 통해
문자가 조형(각)의 형식으로 기념비적인 구성을
갖추었다는 것도 증명하였다.
현대미술은 문자(letter 혹은 typography)가 지닌 권능과
기능을 너무나 잘 인식하였다.
(어쭙잖은) 추상 혹은 구상적 이미지보다 굵고
강렬한 문자의 인상은 그것이 내포한 의미와 함께
관객의 정서를 흔들고 깊게 기억하게 만든다.

이런 문자의 효과를 톡톡히 본 예술가가 있다면,
바로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다.
미국 태생의 멀티 예술가인 그녀의 작품은 마치
타임지와 같은 저널의 표지나 선전용 포스터와 같이
강하게 관객의 시각에 엄습한다.
대학시절 그녀는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를 접하면서
(문자나 사진) 이미지가 갖는 인식적 효능을 알아차렸다.
이후 문자는 콜라주에 의존한 회화작품에서부터 영상이나
설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활용되었다.
특히 Futura Bold Oblique 혹은 Helvetica라는 활자를
이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증폭시켰다.
참고로, 이 글씨체는 주로 포스터나 잡지 표지에 헤드라인에 사용된다.

글씨체와 크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효과도 크지만,
그녀가 작품에 담는 짧고 굵직한 표어들은 시대의 이슈나
담론들을 투사하기에 적절하다.
페미니즘에 기반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치적(혹은 사회적) 메시지는 폭넓다.
사회의 현실과 모순을 지적하는 표어들은 시처럼 혹은
슬로건처럼 정확하고 예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짧고
강렬하게 공감과 동감을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아래의 그림처럼. 는
시기적으로 낙태죄 폐지운동이 한창이었던 1989년에 나왔다.
직접적으로 낙태에 관련된 이미지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상반된 데칼코마니의 양태로 분절된 여성의 얼굴과 그 위에
배치된 슬로건은 이중적인 도덕과 분리된 사회의식 사이의
전쟁터에 내팽겨진 여성의 신체에 대한 논거라는 점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여성의 몸을 두고 싸우는 이 전쟁에서 정작 여성은
투사가 아니라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타자로 살아온
여성과 그런 시각을 지닌 사회에 대한 경고이자 다큐멘터리다.

Barbara Kruger, 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