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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9(14:03) from Anonymous Host
작성자 : 강진모	조회수 : 3470 , 줄수 : 97

벼락의 신

<세월>55

벼락의 신

'벼락의 신은 한 방의 벼락으로 만인에게 겁을 주거든' 하고 김남주는 말했다.
친구 이강과 광숙 그리고 몇몇 후배들이 둘러 앉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벼락의 신은 어둠 속에서도 표적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어둠 속에서 번개에 빛나는 눈빛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지.
벼락이 치는 데,
코를 땅에 박지 않고 눈을 부릅뜬 자,
그리하여 번갯불을 반사하는 눈,
그런 겁대가리 없는 자를 찾아 벼락을 때리거든.
벼락을 맞은 자는 천둥소리를 듣지 못해. 벼락의 주목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천둥을 쳐 겁박하는 것이거든.'

''그래서 실수하여 벼락을 맞을까봐 아예 제 눈을 찌르는 경우도 있지만,
암튼 벼락의 신에게도 지켜야 할 하늘의 도가 있거든.
그런데 인혁당사건을 조작하여 8명을 '전격'처형했거든.
'전격'처형한다는 것은 '벼락을 때리듯' 처형한다는 뜻이잖아?
그런데 벼락은 먹장구름을 통해 오래 충전하고 나서야 방전할 수 있잖아?
청천하늘에서는 충전이 불가능한데,
충전이 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8번씩이나 거듭 방전을 해?
그것은 하늘의 도를 거스르는 짓이라는 뜻이거든''

''벼락신의 무도함을 막으려면 '피뢰침'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박정희가 새끼친 전두환이 광주에서 학살을 할 수 있던 것도,
피뢰침이 없었기 때문이었거든.
그러니까 문제는 충전도 하지 않고 방전을 하는 사기꾼에게
무제한으로 벼락을 공급해주는 자는 누구냐? 하는 거거든.
생각해봐!
작전권이 없는 나라에서 종주국의 허락없이 광주학살이 가능하겠어?
뿐만 아니라 전두환이 저렇게 기세등등한 걸 보아서는,
그는 종주국의 지시를 그냥 '수행'했을 가능성도 있지'

''헌법 74조 1항에 '대통령은 국군을 통수한다'고 되어 있어.
그런데 작전권이 없는데 어떻게 군을 통수해?
그럼에도 작전권을 찾아오려 하지 않는 대통령은 스스로 허수아비라는 걸
증명하는 거지. 그 뿐만 아니라
헌법 60조 1항에는 '주요조약은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어.
국회의 추인을 받지 못한 조약을 무효화하지 못하는 국회도 허수아비임을
하늘을 우러러 증명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 말을 못하는 언론도 허수아비이기는 마찬가지지''

'대통령과 국회와 언론이 허수아비라면 그들 스스로 뭘 바꿀 수 있겠어?
따라서 뭔가를 바꾸려 한다면,
그 변화는 아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거든.
그런데 한미주종관계를 말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생각하는
사대주의자들도 있거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거든.
왜냐하면 종주국 입장에서는 식민지유지가 버겁기도 하거든.
다시 말해서 식민지영속을 더욱 바라는 것은 식민지 앞잡이들이라는 얘기지.
'그러니까 종주국과 앞잡이들은 공생관계이지만,
둘 중에 분단식민을 더욱 바라는 쪽은 앞잡이라는 말이거든.
그대신 앞잡이들은 민중의 증오를 대신 받아주는 방패역할을 해 주지.
사람들이 광주사태의 책임이 있는 미국 대신에 앞잡이인
전두환을 미워하는 것처럼 말이야.
백성들의 원성이 넘쳐 둑이 무너지기 전에,
종주국은 꼭두각시 정권을 갈아치우면 되거든.
그러니까 군사주권이 없는 나라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백날 외쳐봐야 말짱 헛일이라는 말이지..'
그렇게 꽉 막힌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은
1976년 2월 지하조직 '남조선 인민해방 전선'을 만들게 된다.
사법살인을 자행하는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이재문은 전창일의 부인을 통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인혁당 사형수 8명이 입었던 속옷들을 모아 짜깁기하여
남민전의 깃발을 만들어 항아리에 담아 묻는다.
미지근한 사람들은 그러나 남민전에 대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는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등 저명인사 11인이
시위도 농성도 없이 '3.1 민주 구국선언문' 한 장을 낭독했을 뿐인데,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려면 지하활동을 하는 길 밖에 없었다.
더구나 1975년 ‘사회안전법’이 공포되면서 좌익활동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은
전향을 하지 않으면, 보안감호란 명목으로 다시 투옥되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남민전을 주도했던 이재문은 수배중이었고,
김병권과 신향식은 사회안전법 때문에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이재문의 선배인 김병권을 이재문을 잡기 위해 끌고 다녔다.
김병권은 낮에는 이재문을 잡으러 다니는 척 하고,
밤에는 이재문을 만나 수사 방향도 얘기해 주고 정세토론도 함께 했다.
그런 지하생활을 1년남짓 한 뒤, 40살을 갓 넘긴 이재문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유신정권은 북한과 남민전의 관계를 증명하려고 가혹한 고문수사를 했지만
없는 사실을 밝혀 내지는 못했다.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남민전의 존재를 3년 동안이나 감지하지 못한
중정부장 김재규를 경호실장 차지철은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찬밥이 된 김재규는 결국 유신의 심장에 총알을 박게 된다.
계란을 맞은 바위가 부서지게 된 것이다.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광주에서는 수천의 시민군이 총을 들게 된다.
그러한 남민전의 목표는 한마디로 '탈식민'이었다.
민주화와 탈식민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화를 말하려면 반제국주의를, '탈식민'을, 말해야 한다.
'낡은 세계는 사라졌고,
새로운 세계가 오려고 투쟁 중이다.
지금은 괴물의 시대다'라고 했던 그람시의 말은,
하루에 일곱명씩 일터에서 죽어가는, 오늘도 유효하다.